일목마당

短篇

林成澤

망향의 봄

윤호는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 광이 되었다. 8시 일일연속극부터 시작해서 10시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토·일요일드라마를 빠짐없이 시청했다. 진솔한 인간의 칠정에 흥미롭게 젖을 수 있고 그 시간만은 무정한 시간도 멈춰있는 것 같아 좋았다. 드라마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체험하지 못했고 미쳐 알지 못했던 인생의 낭만을 드라마를 통해 체득하고 있었다.

그는 요즘 꿈을 꾸지 않는 밤이 거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꿈을 꾼 것만 생각나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내용은 알지 못했다. 고향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소꿉동무들을 만난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 되어가지만 부모 형제가 없는 고향을 찾아갈 일이 없었고 미련도 없었다. 고향도 자주 들려 어른들도 찾아뵙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그는 이제 면목이 없어서도 찾아가지를 못했다. 그랬는데 요즘 그는 고향 정경이 자꾸만 떠오르며 망향에 잠길 때가 많았다.

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라난 곳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향수는 우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꿈 많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대부분이다. 그는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그는 어머니를 다정하게 부르며 따른 적이 없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나 읍내에서 만난 어머니가 반가워 부르면 다정하게 달려가지를 못하고 오히려 피했었다. 그의 눈에는 초라하게 보이는 어머니가 부끄러웠었다. 그때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미어지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회한의 눈물을 감추는 그는 비록 소용없는 짓이지만 어머니 무덤 앞에 엎드리어 용서를 빌며 통곡하고 싶었다.

윤호는 왠지 근래에 있었든 것은 잘 잊어먹으면서도 어릴 적 옛날에 있었던 것일수록 생생하게 기억이 되었다. 음식도 옛날 어머니가 해 주던 된장찌개 콩나물국 같은 구수하고 소박했든 음식이 입맛에 당기고 먹고 싶었다. 마을길과 뒷산은 봄에는 벚꽃 진달래,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아름다운 정경이 자꾸만 떠올랐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더니 내가 죽을 때가 되어 그러는 건가. 지금쯤 고향에는 벚꽃 진달래꽃이 한창이겠지. 한 번 가보고 싶구나.’ 그는 인생이란 이 세상에 와서 앞만 보고 달리다 반환점을 돌아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원점에 도달하면 사라져 없어지는 게 어쩌면 주검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는 들었다.

길가에는 벚꽃 산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들에는 화창한 봄빛이 가득했다. 평화로운 산야는 한가로워도 고속도로는 많은 자동차가 눈부신 햇살을 자르고 질주했다. 일곱 명의 친구 윤호일행이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벚꽃이 한창일 윤호의 고향 남녘 땅으로 봄나들이를 가고 있었다. 윤호는 몸은 다소 피곤하지만 그가 바라든 고향 나들이라 즐거워 들떠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가로수는 하얀 벚꽃이 눈부시고 넓은 들에는 초록빛 보리밭이 푸른 바다를 이뤘다.

윤호의 고향은 지리산자락으로 둘러싸이고 멀리 섬진강이 바라보이는 산기슭의 작은 산촌이었다. 마을 앞들은 넓지는 않아도 논배미가 있고 마을을 둘러싼 산기슭엔 다랑이 밭이 있고 산에는 소득에 보탬이 되는 산채도 많았다. 윤호는 이런 고향정경을 눈앞에 떠올리며 고향 땅이 가까워지면서 아련한 추억에 푹 잠겨 들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남녀 학생들이 신나게 떠들며 장난치는 소란한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 담임선생이 들어왔다.

“너희들 조용히 자습하라니까 왜 이리 떠드는 거야. 반장 부반장 나와.”

반장인 허윤호와 부반장인 여자 서순복이 나와 겁에 질려 떨고 섰다.

“반장 부반장이 책임을 지고 대표로 벌을 받아라. 손 내밀어.”

반장 부반장이 벌벌 떨며 손을 내밀자 선생이 흑판 지시봉을 들고 때리려고 다가왔다.

“반장인 제가 책임을 지고 혼자서 다 맞겠습니다. 그러니 부반장은 때리지 마십시오.”

“요놈 봐라. 좋아 그럼 너 혼자서 다 맞아라. 손 내리고 종아리 걷어올려.”

선생은 그의 마음씀이 가상하여 두 대만 때렸다. 반장은 맞을 때마다 아파서 깡충 깡충 뛰었다. 윤호와 순복은 같은 마을 소꿉동무였고 그들은 우등생이고 모범생이었다. 그들은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과후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너 아까 왜 그랬어. 고마웠지만 너 맞을 때 내 가슴이 더 아팠어.”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고맙고 가슴 아프고 그러냐.”

멋쩍은 윤호는 순복의 책가방을 빼앗아 들고 달렸다. 순복이 달려 쫓아오자 그는 책가방을 돌려주고 둘은 숨을 허덕이며 바라보고 웃었다.

아련한 추억 속에 푹 빠졌든 윤호는 빙긋이 미소지며 현실로 돌아왔다.

“윤호야. 피곤하니? 쉬었다 갈까?”

“그러자. 화장실도 들리고.”

그들은 휴게소에서 내려 용변도 보고 커피 한 잔씩 마시며 느긋하게 휴식했다. 날씨는 아직 이른봄이라 꽃샘바람이 몸을 사리게 했다.

지리산 온천에 당도한 그들은 펜션에 여장을 풀고 바로 온천장으로 들어갔다. 두메산골이었던 이곳은 온천개발로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들은 온천욕으로 피곤을 풀고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 산기슭을 산책하며 지리산의 신령한 정기를 듬뿍 마셨다. 아침식사를 마친 그들은 다시 온천욕을 즐겼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윤호의 건강을 위해 충분히 휴식할 필요가 있었고 윤호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컨디션이 좋아 보여 기뻤다.

윤호는 구례로 들어서자 그리운 그 옛날의 감회에 잠기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읍내에 있는 구례중학교를 다녔다. 그의 마을에서 중학교까지는 5킬로미터 어린이 걸음으로 30분 거리를 순복이와 함께 같은 학교를 걸어 다녔다. 그들 마을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이웃마을에 사는 병식이 같은 학년이라 하교길은 으레 셋이 같이 오게 되었다. 병식은 힘이 세고 성질도 거칠어서 순복을 자주 괴롭히곤 했었다.

그들 세 사람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길가 보리밭에는 보리이삭이 막 패어나고 있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가려는 윤호를 선생이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윤호를 기다리든 순복은 하는 수없이 혼자서 집에 가는데 병식이 짓궂게 따라오며 괴롭혔다. 병식은 갑자기 순복의 책가방을 빼앗아 보리밭으로 들어가며 따라오라고 했다.

“너 내 가방 일로 안 가지고 와.”

“일로 오면 줄게 빨리 와.”

화가 난 순복은 길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병식은 수복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보리밭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안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순복이와 끌고 들어가려는 병식이 사이에 심한 실랑이가 일어났다. 마침 돌아오던 윤호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마구 달려왔다.

“병식이 너 뭐 하는 짓이야.”

“병식이가 내 책가방을 뺐고 자꾸만 보리밭으로 끌고 갈려고 해.”

“너 순복이 책가방 빨리 안 줄래. 이 나쁜 자식.”

“윤호 너 나하고 한 번 붙어보겠다 이거지. 좋아. 너 오늘 죽을 줄 알아.”

윤호와 병식은 마주 보고 주먹질을 하고 붙들고 식식거리며 용을 쓰다 윤호가 넘어졌다. 병식이 윤호 위에 올라타고 얼굴에 주먹질을 퍼부었다. 원래 힘으로는 윤호가 병식을 당하지 못했다. 차마 보다 못한 순복이 커다란 돌을 들어 병식의 머리를 내려쳤다. 병식이 아찔하는 순간 윤호가 벌떡 일어나 병식을 넘어뜨리고 올라 타 그의 목을 조였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병식이 마침내 항복을 했다. 부끄럽고 창피한 병식은 아무 말 없이 혼자서 먼저 가 버렸다.

“윤호야 고마워. 다친 데는 없니?”

“응. 괜찮아. 너는 괜찮니?”

“괜찮아. 근데 너 참 용감했어. 나 너 다시 봤다.”

“너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절로 났어. 너도 용감했어. 너 아니었더라면 아마 난 맞아 죽었을 거야.”

서로에게 감사하고 위로하며 바라보는 그들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왠지 자꾸만 가슴이 설레 바라보지 못했다.

윤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운 추억에서 깨어났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때처럼 용감하고 자랑스러웠든 적이 없었다. ‘내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해주었던 순복이 네가 그립구나. 보고 싶다 지금 어디서 무엇하고 사니. 너나 내나 이성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가슴 설레던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지.’

“윤호야, 너 기분 좋은 것 같다. 고향에 오니 좋으니?”

“그래 좋다. 감개무량하다.”

윤호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을 누르며 급하게 약병에서 약을 꺼내 입에 넣고 옆의 친구가 컵에 따라주는 물을 얼른 받아 마셨다.

구례에서 하동에 이르는 길은 섬진강을 굽이굽이 따라갔다. 길가에 줄지어 활짝 핀 하얀 벚꽃과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의 푸른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이 더욱 빼어났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섬진강 가의 화개장터에 윤호일행은 도착했다. 그들은 우선 식당에 들려 이곳 별미인 제첩국 백반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주인이 제첩국 선전을 늘어놓았다.

“제첩은 간에 좋은 약효가 있는 식품입니다. 간이 나쁜 사람들 여기 와서 제첩을 먹고 요양하여 많이 나았습니다.”

“윤호야 제첩국 많이 먹어라. 간에 좋다고 하잖니. 맛도 시원하니 좋다.”

“많이 먹는다고 별 수 있겠냐. 너희들이나 많이 먹고 오래 살아라.”

윤호의 허탈해하는 말에 모두 숙연해지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남의 일 같지 않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 그들은 서글펐다.

윤호는 몇 해 전부터 소화가 잘 안 되어 소화제를 상복했다. 작년 가을부터는 소화불량이 더욱 심했고 가끔 가슴에 통증도 왔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올 설 명절을 보내고 종합병원에 가 검진을 받은 결과 간암 말기였다. 시기를 놓쳐 수술은 불가하고 남은 생명은 4개월이었다.

“우리 희망을 가지고 항암치료를 열심히 해 봅시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암과 필사적인 항쟁을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의 말이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는 걸 아는 윤호는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쨍하고 울리며 의식이 정지하고 울컥한 가슴은 공허하니 일체의 감성이 없고 칠흑 같은 눈앞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정신은 붙잡았지만 팔 다리에 힘이 쭉 빠져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을 줄 알았던 것이 내게 오다니. 이렇게 기막힐 수가 있고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4개월이라니 너무 절박하지 않은가.’ 남은 생명이 너무나 짧은 그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뜻밖의 비보에 본인보다도 가족들의 비통함이 더욱 컸다.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막내딸이 급히 돌아오고 검은 구름이 내려앉은 집안은 침통하니 모두 넋이 나가있었다.

“왜들 이러는 거야. 초상이라도 났어. 나 안 죽어. 나 항암치료 열심히해서 꼭 일어설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제자리로 돌아가 일들 하라고.”

“그래요 아빠. 아빠는 꼭 일어설 거예요.”

가족을 위로하려는 윤호의 허전한 말이 허공을 치고 있어 가족들은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윤호는 일주일에 한번 병원에 들려 항암 투약을 했고 아내가 정성껏 마련해 주는 식이요법도 병행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실오라기 만한 기적에 희망을 걸었다.

윤호는 바싹바싹 다가오는 주검 앞에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주검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냐. 가기는 어디로 가냐. 썩어 없어지던가 불타 없어지는데. 몸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늘로서 와서 하늘로 간다고 했다.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건 알겠는데 영은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구나. 몸이 흙으로 사라지듯 영도 공기로 사라지는 것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인생이란 헛되고 헛되며 허무한 것 아닌가.’

세상에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지 못한 그는 세상을 떠나는데 별로 아쉬움이 없었다. 다만 결혼식장에 막내딸의 손을 잡고 들어가 신랑에게 인도하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는 아버지를 붙들고 가장 슬퍼하는 막내딸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저렸지만 따뜻하게 끌어안고 다독거려주지를 못했다. 그는 마음은 여리면서도 가족에게 자상하지 못했고 아기자기한 잔정을 나타내는데 서툴렀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다정하지 못했고 애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다. 이것이 그는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가장 가슴 아파 참회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윤호의 친구들은 이번 여행이 윤호와 함께 하는 마지막 나들이고 그의 마지막 고향방문이라 생각하고 다소 무리를 안고 나선 거였다. 점심을 마친 그들은 화개장터를 둘러보았다. 윤호 어린 시절엔 아줌마들이 길가에 좌판을 벌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광장에 커다란 시장으로 개설되어 관광명소가 되었다. 시장은 여느 재래시장과 다름없지만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엿장수가 쌍쌍파티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있는 공터엔 아줌마들이 관광춤을 신나게 추고있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구경하고 있었다. 윤호일행도 호기심으로 그 속에 끼어 구경하고 있었다. 춤추던 한 아줌마가 윤호에게 다가와 안 들어가려는 그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 함께 춤을 추었다. 멋쩍어하는 윤호를 위해 친구 몇 사람도 들어가 함께 어울려 추었다. 구경꾼들도 들어와 함께 어우러져 한 바탕 신나는 춤판이 벌어졌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5킬로미터 길은 길 양편에 줄지어 선 벚나무에 하얀 눈송이가 쌓인 것처럼 풍요로운 벚꽃으로 꽃 터널길이 되었다. 쌍계사에 이른 그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구경하지만 옛날 학창시절에 소풍을 자주 왔던 윤호는 감탄할 것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벚꽃은 다름없지만 그때는 조용했던 화전놀이가 지금은 몰려온 관광객으로 북새통이구나.’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다니는 화개장터 춤판에서 만난 아줌마들을 만났다. 그들은 반가워하며 인사하고 함께 구경하며 이야기도 나누었다.

화엄사를 둘러싼 산에는 하얀 벚꽃과 빨간 진달래가 수를 놓아 꽃동산을 이루었다. 화엄사 각황전 뒤로 돌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사사자 5층 석탑공원이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석탑을 이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윤호일행은 여기서 또 그 여자일행을 만났다.

“왜 자꾸만 뒤를 졸졸 따라다녀요?”

“누가 따라다닌다는 겁니까. 앞을 알짱거리고 다니는 건 그쪽 아닙니까.”

그들은 이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져 스스럼없이 대화도 나누며 함께 어울리어 구경했다. 한 여인이 일행과 떨어져 공원 한 쪽 바위 곁에서 멀리 둥실 떠가는 흰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 산촌이 고향이고 무남독녀인 그녀는 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죽어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여기 중학교만 나왔다. 그녀는 산다랑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고등학교 남학생을 보면 그리도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동창생 소꿉동무였다. 그녀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열심히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그는 벌써 지나가고 없었다. ‘애라 무정한 놈. 내가 그렇게도 창피하드냐.’ 그녀는 이럴 때 너무나도 서러워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소리 없이 울곤 했었다.

붉은 진달래가 방긋거리는 산기슭 언덕에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감자를 심고있는 산다랑이 밭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꿉동무 남학생이 다가왔다.

“나하고 같이 심을까?”

그는 소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저고리를 벗어 책가방과 함께 밭 언덕에 놓고 들어와 소녀와 함께 감자를 심었다. 소녀는 어이가 없었다.

“너 왜 이래? 창피하지도 않니?”

“예쁜 공주하고 함께 일하는데 뭐가 창피하니.”

“뭐, 예쁜 공주라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니?”

“진짜야. 나도 학교 그만 두고 너하고 함께 일이나 했으면 좋겠다.”

소녀는 그가 진심으로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가슴이 뭉클했지만 현실이 서러웠다. 두 사람이 열심히 해서 일이 일찍끝난 그들은 산에 불타는 진달래꽃을 따라 들어가 바위 아래 나란히 앉았다. 그는 소녀의 손을 꼭 쥐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를 그는 힘껏 끌어안고 잽싸게 키스를 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너는 이제 내 것이다.”

그는 큰 소리치고는 훌훌 털고 가버렸다. 소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짜릿짜릿하고 달콤한 것도 같았던 입술만 만졌다. 그 후로 소녀는 그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 이면 산기슭 언덕길 나무 밑에 숨었다가 그를 만나곤 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늦은 가을에 산다랑이 밭에서 열심히 콩을 거두든 소녀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소녀는 기다리는 그가 나타나지 않아 실망한 표정으로 서산에 걸린 석양빛을 바라보는데 하교에서 돌아오는 그가 보였다. 소녀는 갑자기 만면에 희색이 감돌았고 이를 본 학생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많이 기다렸어. 학교에 일이 있어서 늦었어.”

“실망하고 막 집으로 가려는 참이었어.”

그들은 정답게 손을 잡고 마지막 단풍이 불타는 산으로 들어가 커다란 바위아래 굴로 들어갔다. 끌어안고 키스하던 그는 갑자기 소녀를 눕히고 치마를 걷어올려 속옷을 잡아당기고는 덮쳤다.

“아야. 아프다 비겨라.”

소녀는 그를 밀치고 일어나 돌맹이를 쓸어내고 치마와 쉐터를 깔고는 누어 그를 받아들였다. 소녀는 천지가 개벽하는 아찔했던 아픔과 환희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진학을 위해 곧 서울로 떠났고 그녀는 40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열아홉 순정이었던 그 소녀가 덧없이 흘러간 40년의 세월이 서러워 산마루에 걸린 흰구름 아래 멀리 산촌을 속절없이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윤호는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외로이 산아래 멀리 바라보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보는 순간 웬지 가슴이 찡하니 와 닿았다.

“너 순복이 맞지?”

“그럼 넌 윤호?”

너무나 반가운 두 사람은 주위의 눈도 아랑곳없이 달려들어 끌어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포옹을 푼 그들은 서로를 훑어보며 바라볼 뿐 뭐라 말을 못했다. 그들은 벌어진 입과 사무치는 눈빛이 천 마디의 말을 대신했다.

“넌 여전히 예쁘다. 하나도 안 늙었어.”

“너도 안 늙었어. 여전히 준수하다.”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기적같다.”

“안 죽고 사니까 만나게 되네. 너무나 감동적이다.”

“정말 꿈만 같다.”

감동에 벅차있는 두 사람에게 그들의 남자 여자 친구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여기서 무엇해? 보기 좋은데.”

“저 산아래 조망이 너무 좋아 관망하고 있었어.”

“그래?”

속없이 목을 빼고 너도나도 다투어 산 아래를 기웃거리는 그들을 바라보는 윤호와 순복은 빙긋이 웃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찬바람에 하얀 꽃잎이 눈송이처럼 쏟아졌다. 모두들 손바닥을 벌려 꽃잎을 받으며 환호성을 지르고 좋아했지만 윤호의 가슴은 시렸다.

남녀 두 일행은 같은 식당에서 함께 어울리어 저녁식사를 했다. 이물 없어진 그들은 술도 건배하며 주고받아 마셨다. 여자일행은 여덟 명의 친구가 두 대의 승용차로 오늘 서울을 떠나 구례에서 일 박하고 내일은 여수로 가 자고 모래 진주를 거쳐 귀경하게 되었다.

“고향 까치만 보아도 반갑다는데 우리 오늘 밤 한 번 신나게 놀아 봅시다.”

“좋아요. 근데 어떻게 신나게 놀지요?”

“우리 나이트에 갑시다. 낯선 곳에서 마음껏 흔들어 봅시다.”

“그르지요.”

관광지의 흥겹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들뜬 그들은 쉽게 합의되었다. 윤호와 순복은 고향에 왔으니 옛 마을을 들려보겠다는 양해를 얻어 빠져나왔다.

윤호와 순복은 택시 기사의 인도로 고향마을에 왔다. 옛날 마을 앞 신작로는 고속화도로가 되었고 꼬불꼬불하던 마을진입로는 신작로가 되었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박혀있던 초가집은 슬래브양옥으로 바뀌어 그림 같았다. 상전벽해가 되어 그리운 옛 마을의 정경은 찾아볼 수 없게된 그들은 아쉬움만 안고 읍내로 돌아왔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말도 허구가 되어버렸고 산촌의 낭만적인 정경은 간 곳이 없더구나.”

“그리운 추억만 살아졌다. 윤호야. 우리 어디 조용한데 가서 회포나 풀자.”

그들은 섬진강변에 있는 관광호텔로 들어갔다. 베개가 두 개 나란히 놓여있는 커다란 더블벧을 보는 두 사람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우와. 무드 있고 좋네.”

“쉬기만 하고, 자고 가지 않아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소꿉동무가 좋다. 40년 만에 만나도 이렇게 편하고 쉬운걸 보니.”

“그래 얼마나 반갑고 따뜻하냐.”

그들은 커피를 끓여 한 잔씩 들고 어둠이 깔리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40년의 긴 세월이 흘러갔지만 옛날의 그리운 추억에 포근히 잠겼다. 다정하게 서로 아껴주던 소꿉동무,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주던 친구, 순정까지도 아낌없이 내주었던 첫사랑, 그들은 잊지 못할 그리운 추억이었다. 감회에 벅찬 가슴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연연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결혼은 잘 했어? 애들은 몇이나 두고?”

윤호의 물음에 순복은 갑자기 얼굴이 흐려지며 선뜻 대답을 못하고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난처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얼른 대답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나는 부모님이 주선한 맞선 한번 보고 결혼해 삼남매를 두었고 무역회사에 근무하다 몇 해전에 정년퇴직하고 지금은 백수건달이야.”

“성공했네. 행복한 가정도 이뤘고. 나는 결혼 못했어. 나도 네가 떠난 뒤 바로 서울로 와 봉제공장에 다녔어. 회사에서 보내주는 야간 고등학교도 나왔고 뜻하지 않은 직장상사의 애첩이 되어 아들 하나 두었어.”

“내 죄가 너무 크구나. 용서해라.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너를 찾아갔지만 너는 떠나고 없었고 그 후로 네 소식은 몰랐어.”

“그러지 마. 나는 너를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결혼은 바라지 않았어. 그리고 네 발목 잡았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았어.”

“고생 많았겠구나.”

“행복하지는 못했지만 고생은 별로 안 했어. 그 사람이 아파트도 사 주고 회사 직영매점도 열어 주고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어. 나는 외로운 대신 점포운영에 매진하여 큰 마켓 사장이 되었어.”

“성공했네. 축하한다. 너는 예쁘고 영리해서 성공할 줄 알았어.”

“외로운 인생이 돈 좀 벌었다고 성공한 거냐.”

“그만한 능력에 행복도 추구하지 못했어?”

“나는 바보같이 살았어. 부질없이 흘러간 세월이 너무나 서러워 윤호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 행복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기운을 내.”

“나는 불가항력으로 한때 마음에도 없는 남자의 노리개가 되었지만 너를 잊어본 적이 없어. 물론 네가 첫 남자기도 하지만 내가 사랑한 남자는 너 하나 뿐이야.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엔 오직 네가 살고있어.”

윤호는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한 여자로부터 보지도 못하는 40년의 긴 세월에 걸쳐 사랑을 받고 있었다니 이 놀라운 행복, 이런 벅찬 감동이 있을 수 있나. 강물같이 넘쳐흐르는 행복에 가슴이 터질 것 같구나.’

“내가 무엇이 길래 그토록 가슴 깊이 묻어두었냐. 나도 네가 처음 여자이기에 잊을 수 없었고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너를 생각했어.”

“윤호야. 나 네 가슴에 포근히 안겨 자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윤호는 찡 하고 찔리는 가슴이 너무나 쓰렸다. ‘여자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저토록 목이 말랐을까.’ 그는 달려들어 그녀를 꼭 끌어안고 뜨거운 키스를 오래도록 하고는 들어다 침대에 눕혔다.

여명이 섬진강의 어둠을 밀고 오자 순복은 벌떡 일어나 가게로 나가서 라면 계란 우유 등을 사들고 왔다. 부스스 일어난 윤호는 라면을 끓이고 계란프라이를 하는 등 수선을 떨고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득한 소꿉놀이의 환상이 아련히 떠올랐다.

“일어났니. 나 네게 따뜻한 밥 한끼 해 주고 싶은데 아무 것도 없어 가슴 아프다. 아침은 가서 일행과 함께 먹고, 우선 요기 좀 해라.”

“뭘 가슴 아프다고 하냐. 앞으로 기회는 많을 건데.”

그는 얼른 일어나 밥상을 차려 놓은 탁자 앞에 앉아 뜨거운 라면을 훌훌 불며 맛있게 먹었다.

“우유도 마셔가며 천천히 먹어라.”

“라면 맛있다. 너도 얼른 먹어.”

맛있게 먹고있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무척 행복했다. ‘네게 짐직 밥 한끼를 해주지 못한 게 서러워 가슴이 미어진다.’

“윤호야. 나는 지금 너무너무 행복하다.”

“나도 그래.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 역시 고향은 좋다.”

“옛 모습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고향이 뭐가 좋다고 그르냐?”

“아니야. 벚꽃은 그대로잖아. 그리고 너와 내가 그대로 있잖아. 지금 생각하니 내가 그리던 고향은 바로 순복이 너였어.”

이번에는 순복이 감동했다. ‘네가 그리던 고향이 나라고? 그럼 너도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이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있나.’

“내가 네 고향이라고? 나야말로 고향하면 생각나는 건 너뿐이야.”

그랬다. 그들의 망향은 바로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들은 그 그리움이 있어서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윤호의 수구초심도 바로 순복이 고향 언덕이었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곧 망향이었다. ‘내가 순복이 너를 만나려고 마음이 자꾸만 고향으로 흘렀고 그리도 고향에 가고 싶었는가 보다. 이제 나는 이 땅에 아무런 여한이 없다. 정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순복아 우리 올라가는 대로 단둘이서 여행하자. 2박3일정도 콘도에서 자유롭게 쌓인 회포를 다 풀면서 지내보자. 네가 한 따뜻한 밥을 먹으며.”

“좋아. 나야 대환영이지.”

윤호는 여명이 절박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복은 얼굴에 화색이 피며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짝였다.

“순복이 너 몸조심하고 건강관리 잘 해라.”

“너도 마찬가지야. 근데 너 어디 아프니? 기운도 없어 보이고 많이 말랐어.”

그녀는 왠지 그의 건강이 부실해 보여 염려되었다. ‘고생을 많이 했나. 올라가면 좋은 보약을 많이 해 주어야겠다.’

“윤호야 너 먹고싶은 것 있으면 언제고 말해. 내 실컷 사줄게.”

“알았어. 니 덕에 실컷 한 번 먹어보자.”

윤호는 기약할 수 없는 말을 허탈하게 허공에 내뱉으며 뜨거운 눈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내려 가슴을 적셨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윤호는 하루 밤을 푹 자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좋았다. 가족도 그의 좋은 컨디션을 보고 여행이 효과가 있었나 하고 기뻐했다. 의사의 진단대로라면 그의 생명은 이제 한 달이 채 못 남았다. 아파트광장의 벚꽃은 간밤에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에 우수수 다 떨어졌다. 그리도 눈부셨던 벚꽃이 무참히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것을 창 밖으로 내다보는 윤호는 갑자기 팔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날 저녁뉴스에 벚꽃관광을 하고 돌아오던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언덕 아래로 떨어져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다쳤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망자는 여자 서순복 그리고 두 명의 여자 부상자 명단도 나왔다. 아연실색한 윤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어찌 이럴수가. 따뜻한 그 밥 한끼를 못해 준 한이 서러워 어떻게 눈을 감았을고.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고 내일의 하찮은 기약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구나.’

윤호는 갑자기 닥쳐온 통증이 너무 심해 약병의 진통제를 꺼내 먹으려다 쓸어졌다. 놀란 가족이 달려와 진통제를 먹였지만 통증이 멎지 않아 몸부림치는 윤호는 의식을 잃어갔다. 당황한 가족은 황급히 구급차를 불러 그를 싣고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