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마당

散文

申相烈

원점(原點)

나는 상당 기간 자책과 회한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얼마나 바라던 곳이었던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그런데 나는 어렵게 들어간 이 학교를 쉽게 퇴교하고 말았다. 동기생들의 만류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교수님들의 충고도 마다하고 돌아섰었다. 그런데 동기생들이 훗날 장군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속물적(?) 회한에 무던히도 가슴앓이를 하였다.

오늘의 출석률은 별로 좋지 않다. 회원 열 한 사람가운데 겨우 여섯 사람만 나왔다. 우리는 <육사 14기 테니스 동호인들>이다. 한 달에 두 번 모임을 갖는다. 석 달째 내리지 않은 비로 코트의 흙은 콩가루가 되어있다. 기상관측이래에 최악의 가뭄이라고 했다. ‘햇볕정책이 지나쳐 가물어버린 것’이라며 평소의 불만을 털어내는 회원도 있다.

우리들은 한 여름의 뙤약볕아래 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며 열심히 코트를 누볐다. 평원의 야생마처럼 뛰었다. 야생마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적어도 기분은 그랬다는 말이다. 고희를 바라보는 60대 후반의 노인들이 달리면 얼마나 달렸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라켓을 휘젓고, 날렵하게 공을 감아 치곤 할 때면 시퍼런 청년장교 시절로 되돌아간 모습이었다. 고함을 칠 때엔 왕년의 제병(梯兵)을 지휘하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날씨 탓인지 크고 작은 시비가 잇따랐다. “너, 이러기야?” 스매싱으로 하마터면 얼굴을 맞을 번 한 김 교수가 발끈하여 고함을 친다. ‘폴트’ 여부를 놓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심판도 안중에 없다. “이봐, 내려와!” 아예 심판대에서 내려오라는 불호령이다. 하는 짓들이 야수(野獸)처럼 거칠다. 앞에서도 야생마란 말을 썼듯이 이처럼 동물적 비유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두 달 동안 인간 아닌 짐승(?)으로 다루어지던 때가 있었다.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에서 신입생 훈련과정을 ‘Beast Time’으로 부른데서 연유했다. 지옥훈련으로 알려진 육사에서의 ‘기초 군사훈련’은 철없는 소년을 어른으로, 그리고 한 사람의 군인으로 철저하게 바꿔놓는다. ‘지(智), 인(仁), 용(勇)’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교훈이며 미래의 바람직한 인격의 틀이다.

나는 이곳에서 고작 일 년 남짓한 짧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 체험한 생도생활의 규범과 정신은 거의 평생 동안 나를 지배하고 지탱하였다. 웬만한 시련은 고생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사회생활에서 신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직과 명예를 우선하는 그것들 때문이었다.

“자 ―, 이제 그만 씻으러가자.”

탕 속에 들어앉아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칼을 훑고 있는 그들은 더 이상 맹수의 모습은 아니다. 늘어진 피부와 볼썽사납게 뭉쳐진 뱃살 또한 멋들어진 사나이의 몸매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평생의 유니폼엔 빛나는 훈장들로 가득 찬 역전의 용사들이다.

차가운 달빛아래 철조망을 벗 삼고 벙커에서 젊음을 보냈다. 무한궤도에 몸을 싣고 산하를 누비며 이 땅을 지켰다. 그리고 물고 뜯는 처절한 동물적 생존경쟁에서 명예롭게 소임을 다하고 마침내 제복을 벗었다.

하루 날이 저문다. 만남의 마지막 자리는 먹는 자리다. 땀 흘리고 씻고 나니 목마르고 출출하다. “아가야, 찬 것 가져오너라.” “오늘의 그랑프리는 무어네 해도 <허 탱크>야. 밥 먹고 테니스만 쳤나?” 모임의 회장이 말문을 연다. “자, 잔 들고, 우리 건강을 위하여 건배하자. 위하여!” 동시에 “이대로!”의 합창이 뒤따른다. ‘이대로’는 더 이상 늙지 말고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의 절규다.

열아홉 살, 사범학교를 졸업하면서 시작한 인생유전은 운전대를 놓아버린 자동차처럼 좌충우돌하며 아슬아슬하게 칠십 평생을 달렸다. 때마다 “하고야 말겠다”며 벼른 일들은 단 한 번도 시원스럽게 되질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낱알의 구슬이었다. 때가 되니 훌륭한 목걸이가 되었다. 하나하나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하길 참 잘했다’는 말로 매듭지어졌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중퇴한 것은 잘못한 선택이었다고 두고두고 후회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보이지 않고 동기생들만 보였다. 그러나 그들도 때가되니 유니폼을 벗었다. 그들이 군복을 벗던 날, 그들은 나와 꼭 같은 모습으로 원점(原點)에 와 있음을 보았다. 동시에 평생 따라다니던 회한 속의 응어리도 깨끗이 사라졌다. 결국 우리에게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각자의 역할이 따로따로 있었음을 알았다.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누드화(畵) 申相烈

화실의 출입문 안쪽으로 없던 휘장이 쳐있었다. 무심코 이것을 제친 순간 그만 눈을 딱 감고 말았다.

강렬한 조명이 원탁 위의 피사체로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소나기 지나고 먹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찬란한 햇살과도 같았다. 전라(全裸)의 여체가 비스듬히 거기에 누워 있었다.

훗날, 거의가 여자들인 회원들은 내가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아 웃어죽을 뻔했다고들 말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여인의 누드를 대하였으니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었다. 그나마 둘러보니 비집고 들어갈 공간마저 없었다. 그들은 그리기 좋은 쪽으로 몰려있었다. 결국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치마저 볼썽사나운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내려 깐 눈길을 천천히 치켜 올렸다. 그리고 성물(聖物)을 대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누드를 눈 안에 담았다. 제1호의 누드 그림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인체는 신의 배려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여인의 누드는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흔히 황홀하다는 표현을 쓴다. 빛으로 덧 씌워진 여인의 나신(裸身)은 세상의 어느 피조물보다도 곱고 아름답다. 뽀얗게 드러난 단색의 누드는 빛과 그림자가 엮는 신명난 한마당의 향연에 비유된다.

채색화이기보다 단색의 묵화(墨畵)가 어울린다. 누드 한가운데에 먹물 한 점이 유난하다. 가볍게 번진 보송보송한 한 움큼의 흑점, 요정의 숲처럼 요기가 서린다. 밋밋한 곡선이 머물다 가는 곳, 단색의 단조로움마저 쉬어 가는 곳, 인체의 오아시스가 거기에 있다. 흑발이 심해의 수초처럼 끊임없이 출렁인다.

초가지붕 위에 반 남아 묻힌 동그란 박 덩이를 보았다. 오디 같은 꼭지가 그 위에 얹혔다. 금세 용암을 터트릴 듯 검붉다. 숨소리마저 잠잠한 화실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그런데 손끝의 붓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심장소리 때문이다.

인간의 알몸은 참 아름답다. 누드화를 보거나 누드 그림을 그리는 광경을 상상만 해도 침이 꼴깍 삼켜지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인간의 천성이고 신이 준 축복이기 때문이다.

예술에 있어 외설은 적당량의 독약이라고나 할까. 성(性)의식 없는 우리들의 삶을 상상할 수 없듯이 적절한 외설은 우리들의 삶을 생동하게 한다. 외설이 외설로 끝나면 외설이지만 외설이 예술로 승화되면 그것은 훌륭한 예술이 된다. 외설에서 끈적끈적한 기름기만 빼낸다면 그것은 순수한 영혼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생활과 꿈이 교배해서 잉태한 또 다른 꿈이다. 하물며 그것이 인간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훌륭한 예술이 아니겠는가. 누드가 바로 그것이다. 오죽 인간의 누드가 아름다웠으면 신들조차도 인간의 형상을 빌렸을까. 여인의 누드를 대하면 끝없이 분출하는 욕망과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조화와 질서를 체험한다. 때문에 그것을 ‘소(小)우주’라고 하나 보다.

「그림은 손끝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그리는 것이다」고 말한다. 직접 모델을 눈앞에다 두고 구석구석 관찰을 하면 온 몸의 육감은 칼날처럼 곤두선다. 하지만 이것들은 상호 유기적인 감흥과 지각으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질서가 형성되고 그것은 마침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형상화된다. 참 그림은 손끝이 아닌 가슴에서 나온다는 말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살아 숨 쉬는 여인의 알몸은 생동하는 예술로 승화되어 작품의 심오한 원동력을 제공한다. 누드화가 그 어느 장르의 그림들 보다 위대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바로 생명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누드화라고 해서 뇌쇄적 관능의 외설적 표현만이 다가 아니다. 얼마든지 삶의 애환을 그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빈센트 반 고흐의 누드화를 살펴본다. <SORROW(비애)> 라는 누드화에서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성적인 매력은 없다. 왜냐하면 그림 속의 모델과 작가(고흐)는 고뇌에 찬 삶의 속살을 (관능적 표현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누드를 통하여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아름다운 슬픔’이란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로이 리히텐수타인의 작품 <행복한 눈물>도 비슷한 주제의 표현일 수 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희·노·애·락을 누드로 표현할 수도 있다.

“선생님, 참 데생도 좋고, 구도도 좋으시네요. 헌데, 한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언제나 친절한 Y여사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나의 그림을 지켜보고 있다.

“그럼요.”

그녀는 국전 입선작가다.

“그 부분 …, 퓨어 블랙을 좀 순화시키시지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채지 못하여 “예?” 하며 되물었다.

“너무 강해요. 물론 선생님은 정직하게 본대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무채색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브라운을 섞어 쓰세요. 인체의 모발은 블랙이 아닙니다. 블랙은 색이 아닙니다.”

강렬한 조명이 빚은 착시(錯視)란다.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퇴직 후 어언 3년여의 화실 출입이 이어지면서 대 여섯 쪽의 누드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나의 아틀리에를 찾는 친구들은 어김없이 그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어떻게 하면 누드모델의 실물을 볼 수 있겠느냐’는 속 빠진 물음도 한결같다. 그들의 외설적 관심에 나의 준엄한 대답이 터진다.

“이 속물들아, 무식한 친구들아. 퓨어 블랙이 무채색인 줄이나 알기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