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마당

散文

朴暾緖

군사문화와 건배구호

며칠 전 어느 친지의 자녀 결혼식에 갔다가 좀 의외라는 느낌을 받은 일이 있다. 피로연에서 사회자가 건배를 제의하면서 “위하여”라고 외치는 것이다. 하객들은 엉거주춤하게 따라하기도 하고 우물쭈물 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군에서 시작되어 일반사회에까지 퍼진 이 구호가 관이나 군에서는 아직도 쓰이지만 민간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줄 알고 있다가 결혼 피로연에서 듣게 되니 의외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주법에는 건배라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서양 문물과 함께 근래에 들어온 관습이 아닌가 한다. 중국 사람들은 “깐빼(乾杯)”하고 잔을 높이 들었다가 잔을 다 비운 후에 식탁에 엎어놓아 술을 다 마신 것을 확인시켜주고, 일본 사람들도 “칸빠이”하고 건배하는 관습이 있으며 월남전쟁 때 잠깐 가본 베트남에서도 “깐빼”라고 하는 것을 기억한다. 건배는 문자 그대로 잔을 아주 비워야 되므로 우리가 보통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건배가 아니고 축배라야 옳을 것이다. 건배할 때 “지화자”라고 선창하면 “얼씨구”하고 응답하자고 이어령 교수(초대 문화부장관)가 제안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흥을 돋우고 즐거움을 나타내는 뜻에서 좋고 뭣보다도 순수한 우리말이라서 좋다. 그러나 별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영어의 “cheers”도 거의 비슷한 뜻일게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 보트르 상떼(당신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하는데 뜻도 물론 좋지만 역시 프랑스말 답게 소리가 음악적이다. 근래 들은 건배 제의에서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 구호가 있다. 건배 제의자가 “당신!”하면 모두 “멋져!”하고 화답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당하게 살자’와 ‘신나게 살자’이고, ‘멋져!’는 ‘멋지게 살자’와 ‘져주며 살자’의 줄임말이다. (이 부분은 현재 시점에서 첨가한 것임)

모두 잔을 높이 들고 일제히 “위하여”하고 외치는 것은 매우 힘차고 일사불란하여 군에서는 어울리는 축배 관습임에 틀림없으나 일반사회에서는 다소 위화감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폭탄주라는 것도 역시 군에서 시작되어 일반에게까지 널리 전파되었다고 하는데 그 발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운치 있고 품위 있는 주법과는 거리가 멀다. 군대 내에서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음주문화는 문제가 많다. 강제로 술잔 돌리기, 만취할 때까지 과음하는 습관, 2차 3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 두주불사하는 것을 호연지기나 남자다움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이 군대에서 더욱 조장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군에서는 지휘관의 의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은 군의 속성상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가 자칫하면 부하들이 지휘관의 눈빛 하나, 일거수일투족에 과민해지고 지휘관은 독선에 빠지는 경향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일반사회에까지 파급되어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 「권위주의」는 청산되고 「권위」는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이 몇 해 전부터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데, 학문적으로는 어떻게 정의되고 구분되는지 모르나 권위주의는 「권력」이 그 핵심이고 권위는 「규범」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는 근래 많이 희석되고 있으나 권위의 회복은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법의 권위·도덕의 권위·학문의 권위·부모의 권위·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본다.

앞에서 언급한 ‘위하여’·폭탄주·권위주의 등이 흔히 군사문화라고 지적받는 몇 가지 예들인데, 군에서 일반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군사문화가 아니고 부정적인 면만 군사문화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느 학자의 정의에 의하면 군대문화가 다른 집단의 문화를 지배하면 그것이 군사문화가 된다고 한다. 문화라는 용어는 매우 광범위하고 다의적으로 쓰이나, 한 집단의 사고·행동 양식이나 생활 패턴을 가리킨다고 협의로 해석할 때 군대라는 집단에는 독특한 군대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문화가 다른 집단에까지 전파되어 지배적이 될 때 군사문화라고 지칭한다는 것이다. 문화란 물과 같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게 되어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군사문화가 모두 부정적인 면만 갖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군사문화가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비치는 것은 문화의 흐름이 중력법칙에 따라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된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오랫동안 군부가 국가경영을 주도해온 데 대한 염증과 반감이 더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

여하간 우리 군은, 그리고 군을 아끼고 모교를 사랑하는 우리 동문들은 겸허하게 반성하고 군사문화가 긍정적으로 평가되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다시 한 번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근 군에서 인사의 공정성을 강조하고 모든 사조직을 없애도록 하며 음주 관행의 잘못을 고치는 등 새로운 바람이 부는 듯하여 매우 반갑고 흐뭇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하고 진작 그랬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 뿐이지만, 이제까지의 잘못된 관행을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그 시정을 촉구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용기있는 조처들이라고 평가한다.

돌이켜보면 37년 전(이 글을 쓴 92년 시점에서) 11기생들이 4년제 정규육사 1기라는 긍지와 구국의 사명감에 벅찬 가슴으로 힘차게 화랑대를 발진한 뒤, 들려오는 소식은 처절한 투쟁 얘기와 보람찬 무용담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그때 무슨 전투가 있었나 의아하겠지만 사실 전투 아닌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점차 질서가 회복되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나 아직도 혼란과 부조리가 판을 치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빈약한 주·부식비가 이리저리 뜯기고, 미국 원조로 나오는 피복을 시장에 유출하고, 후생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트럭·불도저 등으로 장사를 하고, 마구 벌목한 나무를 부대 내에 설치한 제재기로 제재하여 내다 파는 등 그 난맥상은 형언할 수 없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장교나 하사관의 봉급이 최저 생계비의 10분의 1도 안되는 원천적인 모순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1기 졸업생들은 소위 계급장 하나 달고 소속한 각 부대에서 부조리·부패라는 적과 고군분투하였던 것이다.

당시 수업시간에 수업은 제쳐두고 부대로 나간 선배장교들의 체험담을 들려주는 교관이 많았고 그런 얘기에 우리는 무척이나 감동을 받곤 했다. 당시 교관들 가운데는 수업시간에 시국이나 세태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고 우리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사관생도들에게 나라를 바로 잡으라는 사명감을 고취하는 분이 많았다. 그런 얘기로 수업진도에 차질이 생기는데 엄격한 데일리시스템(매 과목, 매 시간 시험을 치는 제도)아래서 시험은 꼭 봐야 하니까 그날 수업의 요점만 설명하고 시험지를 돌리던 일이 종종 있었다. 요즈음 같이 체제가 꽉 짜여진 상황에서는 있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분들이 들려준 것 중에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최전방 고지에 부식을 등짐으로 나르는데, 병사들이 하도 배가 고파 앞사람의 등짐에 있는 두부를 자꾸 뒤에서 떼어 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남는 것이 없는 지경인데도 차마 처벌할 수가 없더라는 얘기며, 부대 출입하는 기관원이 뻔히 하사관인 줄 아는데 경례도 안하고 횡포가 심해 주먹으로 응징했다는 얘기 등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14기가 임관해 부대에 부임한 58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사단장이 육사 출신을 뽑아 급양감독반이라는 특수 임무팀을 만들어 각 예하부대를 순회하며 주·부식 유출과 급식상태에 대한 감시를 시킨 것도 이 시절의 일이다.

56년인가에 「사상계(思想界)」(당시 자유당 독재 아래에서도 정론을 펴 청년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가장 많이 읽힌 월간지)에는 “청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서울대의 어떤 교수가 육사 교수의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한 나머지 기고했는데, 그 내용이 바로 4년제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이 부정부패와 싸우는 사례를 소개하고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밝고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 확산되고 있으니 우리의 장래는 밝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무능과 부패의 늪에서 허덕이며 개혁의 기미조차 찾아볼 수 없던 암울한 자유당 정권 시대였다. 이 당시 팽배했던 육사의 정신, 즉 도덕성 회복에 대한 강렬한 사명감과 부정부패에 대한 단호한 배격, 이러한 기상이 점차 퇴색되지 않았나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한다. 물론 그 이후 전개된 시대 상황이 당시와는 달랐으므로 우리의 대응자세도 변화한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도의의 확립’임을 뜻있는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현재의 도덕수준으로는 절대 선진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군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사랑을 받도록 큰 변신이 있어야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군사문화의 긍정적 면이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육사 초창기에 충만했던 사명감과 열정을 다시 떠올리고 이어받아 “청신한 바람”을 다시 불어오게 하자. 우리가 군복을 입었건 벗었건, 어느 위치에 있건 다시 한 번 심기일전, 우리 사회의 도의 재건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필자 주 : 이 글은 1992년 3월 육사신보에 ‘군사문화와 도의재건’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것을 일부 손본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