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마당

散文

단상 I

요즘의 내 몸 상태는 각종 병마가 친구하자고 어깨동무하는 듯하다. 작대기로 쫓아 낼 수도 없으니 이 병마 친구를 살살 달래 친구 삼아 남은 인생 순탄하게 살고 싶은 바람, 마음가짐이 있다.

이러한 내 바람에 도움이 되는 책을 최근에 읽었다.

13년 동안 외과 의사로 생사를 넘나드는 암환자를 접한 이병욱박사가 쓴“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수필집이었다. 비록 암이라는 특정 질병에 관계된 환자 치료법과 가족들의 실천에 관한 내용이였지만, 나에게도 유용하고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내용 일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암 선고를 받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병을 부인하고, 회의, 분노를 나타낸다. 이 때 표출되는 분노는 그 동안 쌓인 한이 일시에 분출되는 것으로, 이 과정을 잘 넘겨야 치료가 원활히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평생 남 해코지 않고 살았는데.. ,

이제 살 만 하는데 죽다니..,

이건 전부 내 속을 썩인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날 잡아 먹었어..”

이런 지글지글한 원망과 분노가 배우자에게 향해 이혼까지 하게 되거나 자살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기도 한다. 환자의 분노를 적절히 어루만져 주는 것이 주위 가족의 역할이다.

“그래요, 여태까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 탓이에요,

당신한테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제가 부족했어요.

앞으로는 잘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가족은 힘들더라도 환자의 분노를 감내하고 수용해줘야 한다.

그런데 환자 뿐 아니라 가족의 가슴에도 응어리가 있으면 맞불이라는 최악의 대응도 불사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당신이 나를 괴롭힌 게 얼마데.

하늘이 알아서 천벌을 내렸네요.”

이런 종류의 치명적인 말들은 암보다 먼저 환자를 잡아먹는 독약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당신이 있어서 행복해요.

당신과 맺은 인연이 소중하고 감사해요.

당신이 느끼는 고통과 아픔,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힘들지만 잘 해내고 있고 조금만 더 견뎌 보세요.

도울 수 있어 기뻐요.

당신이 최고이에요.”

가족의 이런 따뜻하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말은 환자에게 힘든 투병 생활을 견딜 의지와 힘을 준다.

책은 암선고를 받았을 때, 첫 시련일 수 있는 분노를 지혜롭게 표출하는 것이 투병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 이병욱박사는 외과의사이면서도 환자는 가족의 사랑을 받을때 행복해하고, 그 행복한 마음이 가장 중요한 암치료제이며 치료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은 한이라는 정서에 친근하다. 참을 인(忍)자를 삶의 중요 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에 암환자가 아니더라도 모두의 가슴에는 인내가, 한이 겹겹이 퇴적되어 있다.

인생에서 도저히 내 힘으로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태산(암이라는 불치병 등)을 만나면 주변 상황을, 가족들을, 하늘을 원망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나 또한 그러한데, 이 책을 통해 병마와 길동무를 하기 위해서는 적절히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단상 II.

임관 50주년은 나에게 더욱 특별한 날이다. 그 이틀 뒤에 많은 동기생 생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혼배 성사를 올렸기 때문이다.

공장의 공산품 마냥 겉모습이 똑같아 보였던 우리 육사 14기 생도들. 그러나 제 각각의 가슴에 벅차 오르는 감흥과 앞 날에 대한 이상은 어떻게 표현해 볼 수 있을까. 찬 공기에 입춘의 훈훈한 바람이 스며들면 산과 들, 길가의 논둑 밭둑에 애기봄맞이, 앵초, 봄맞이꽃이 무리지고 피고, 개나리 진달래 철쭉 목련의 향연도 순도 높은 취기로 오감을 사로잡는다. 우리의 이상은 봄볕으로 세상을 바꾸듯 신선한 생동감에 활기 찾으며, 마음 속 감격과 감흥은 꽃빛깔 마냥 다채로웠다.

인생의 큰 문, 임관과 결혼 앞에서 나의 마음가짐은 정녕 이러했다. 마침내 작은 꽃을 피운 것과 같은 벅차오름만 있었지, 현실의 무거운 책임감은 없었다. 어깨에 소위 계급장을 달고, 소박한 결혼반지를 끼며, 나는 나라에 충성하는 군인과 최선을 다 하는 남편이 될 것이라고 다짐할 뿐,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의 인내와 순응을 깨달지 못했다.

50년의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우리의 겉모습은 이제 공산품처럼 똑같지 않다. 너무나 달라져서 어쩌면 자신에게 조차 낯선 존재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마음속에 깃든 감흥과 앞날에 대한 바람은 똑 같을 것이다. 주어진 인생을 묵묵히 살아냈고, 훈장 같은 내일이 남겨져 있길.

단상 III.

은퇴하고 나서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농장을 마련했다. 농촌 출신의 내 마음은 서울을 떠나 농토로 들어가 진짜 농사꾼처럼 땅을 일구고 사는 것이었으나, 서울 태생 아내의 완강한 반대로 근교에 작은 농장을 구한 것이다.

십 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어린 묘목도 심고, 여름에는 쌈 종류 고추 오이, 가을에는 김장용 배추 파를 심으며 무성한 잡풀과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적은 땅이지만 내가 정성을 쏟고 일한 만큼 농장은 깨끗하게 보기가 좋고 맛나게 먹을 수 있는 푸성귀를 내 주었다.

대강 날림으로 일하면 금세 모양새가 나빠지는 땅을 보며 성실과 근면이 삶의 기본임을 확인했다. 운동 대신이라고 농장 일을 꾀부리지 않고 했는데 이제는 마음도 몸도 힘에 부쳐 남에게 맡겼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백발의 잔주름 많고 어깨 구부정한 노인네가 있다. 임관 때는 봄 꽃 같았고, 중년기에는 열매 가득 달린 풍성한 과실주, 잎사귀 무성한 거목이였는데, 이제는 노목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에서의 나무는 아낌없이 다 주고 나중에 그루터기가 된다. 아직까지는 봄바람 불면 나무 가지에 여린 초록의 새순 솟듯, 내 마음 속에 일상의 다양한 즐거움과 재미가 솟는 걸 보면 그루터기가 되려면 아직 먼 듯하다.